[신문은 선생님] [숨어있는 세계사] 교황 비판 ‘삐라’ 종교개혁에 큰 역할… 전쟁 땐 ‘종이 폭탄’

지난달 대북 전단, 일명 ‘삐라’ 살포를 금지한 ‘대북 전단 금지법’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어요. 헌법재판소는 이 법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어요. ‘삐라’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은데, 광고 포스터를 뜻하는 영어 단어 ‘bill’이 일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며 변형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해요. 세계사 속 중요한 사건에도 종종 등장한 삐라의 역사를 살펴볼까요?

종교개혁 때 전단 확산

삐라의 시작은 전단 광고라 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전단 광고는 무엇이었을까요? 기원전 1000년쯤 고대 이집트 수도 테베에 뿌려진 노예 수배 광고가 그 시작으로 알려져 있어요. 구체적인 내용은 ‘셈이라는 노예가 주인으로부터 도망쳤는데 데려와 주기를 바란다. 셈은 히타이트인으로 키는 5피트 2인치이며, 붉은 얼굴에 갈색 눈을 가지고 있다. 셈의 거처를 알려주면 금화를 주겠다’는 것이었어요. 이 파피루스 종이는 지금까지 박물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이처럼 초창기 전단은 소식을 널리 알리는 광고(廣告) 목적이 많았어요.

1525년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묘사한 루터파 전단. /브리태니커

시간이 흐르면서 전단은 대중 동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어요. 벽보 형태로, 때로는 팸플릿 형태로 온갖 종류의 전단이 뿌려졌습니다. 특히 종교개혁 시기에 그 영향이 컸습니다. 1517년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타락한 중세 교회를 비판하며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 조항의 반박문’은 개혁의 불씨를 붙였어요. 그런데 이 불씨가 대중에 급속히 확산된 것은 인쇄술 덕분이었습니다. 루터의 반박문과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소책자가 빠르게 인쇄돼 곳곳으로 퍼져 나갔거든요.

전단은 종교개혁이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낱장 전단지는 본래 성상(聖像) 그림이 그려져 있어 휴대하고 다니며 관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종교개혁 때는 전단이 선전 매체로 새로운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전하려는 내용을 간결하고 단순화해 이미지로 표현하고 그 하단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죠. 이는 전달력이 뛰어나 대중에게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잔혹한 만행을 알리고자 1942년 미국이 인쇄해 뿌린 전단.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당시 루터와 지지자들은 그림이 들어간 다양한 팸플릿을 만들어 교회의 악행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퍼트렸어요. 주로 교황을 비판하거나 악마로 표현해 사람들에게 공감을 호소했는데, 한 예로 1523년 루터는 교황이 괴물로 변한 상징적 그림을 목판화로 찍어냈어요. 이 팸플릿을 통해 ‘심판의 날’이 다가왔음을 알렸죠.

이외에도 음식, 결혼, 성(性), 금화를 낳는 당나귀 등 요소를 활용해 교황과 가톨릭 성직자를 비판했어요. 가톨릭 교회의 반박 역시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종교 개혁기 루터파와 가톨릭은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하는 데 경쟁적으로 전단을 활용했어요.

전쟁 때 ‘무릎 높이’까지 뿌려진 삐라

전단이 정치적 선전 목적, 즉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삐라’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전쟁에서였어요. 전시(戰時)에는 워낙 많은 양이 뿌려졌기 때문에 ‘종이 폭탄’이라고도 했어요. 삐라는 일반적으로 적군이 휴대하기 편하도록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로 제작됐어요. 직관적인 그림이나 사진, 그리고 문구를 함께 사용한 형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미 극동군 총사령부가 공산군의 투항을 유도하려 전단 형태로 배포한 통행증. 뒷면에는 국제법에 의거한 투항 절차가 적혀 있어요.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특히 삐라는 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더욱 자주 이용됐어요. 전쟁이 총력전 형태로 전개됐기 때문이에요. 총력전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 것이 심리전이에요. 심리전이란 ‘명백한 군사적 적대 행위 없이 적군이나 상대국 국민에게 심리적인 자극과 압력을 주어 자기 나라의 정치·외교·군사에 유리하도록 이끄는 전쟁’을 일컬어요. 선전을 통해 아군의 우월성을 상대의 의식 속에 강제 주입하기도 합니다. 아군에게 유리한 사건만 보도하고 적군에게 불리한 정보는 확산시키면서 적군의 부정적 이미지를 부각하는 거죠.

1차 세계 대전 때도 6500만장에 달하는 삐라가 독일 전선에 뿌려졌지만, 2차 대전 때는 훨씬 더 많은 80억장 이상 삐라가 뿌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특히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 괴벨스는 선전이 대중을 동원하는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선전 활동을 했어요.

나치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전전을 펼쳤다면, 연합국은 이에 대응해 주로 적의 병사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심리전을 전개했어요. 특히 미국은 대본을 작성하는 작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 등을 모집해 팀을 꾸렸고 엄청난 물량의 전단을 인쇄해 공중에 살포했어요.

1956년 6월 1일 미8군 사령부 심리전 부서가 일월산 일대 빨치산 송태수 등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내용을 담아 제작한 전단.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태평양 전쟁 막판에는 일본 본토에 2~3개월 동안 2억장 이상 삐라가 살포됐어요. 일본인의 모습을 비참하게 묘사한 그림을 그려 사기를 저하시키는가 하면, 폭력적인 군국주의자와 평화주의자 일왕을 대비하며 군국주의 세력과 일왕을 분리하려 했죠. 당시 미국 측 보고서에는 ‘모든 심리전 활동의 결과는 너무 만족스러워서 모두에게 충분한 믿음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어요. 실제로 필리핀에서 일본군 포로 4분의 3이 삐라를 보고 항복했을 만큼 효과가 있었다고 해요.

미국은 삐라가 심리전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6·25 전쟁 때에도 적극 활용했어요. 미국은 참전하면서부터 휴전할 때까지 전선과 후방에 무려 25억장의 삐라를 뿌렸다고 알려져 있어요. 삐라는 마치 펑펑 내리는 눈처럼 뿌려져 어떤 때는 병사들 무릎까지 차올랐다고 하죠. 워낙 양이 많아 남쪽뿐 아니라 북쪽에서도 휴지나 메모지로 사용됐대요.

잘 알려진 삐라는 투항과 귀순을 권유하는 전형적인 내용의 ‘안전보장증명서’예요. 이외에도 공산주의를 ‘노예 세계’로 표현하며 ‘자유세계’를 강조하는 뉴스 형태 삐라, 담배를 말아 피울 수 있는 종이로 만든 삐라 등 다양한 형태의 삐라가 만들어져 살포됐습니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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